관덕정

답사/09 4.3 기행 2013. 2. 24. 12:38

 

관덕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조선 세종 30년(1448)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대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자 지붕이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를 기둥 위에 두개씩 자 놓았다.(이익공 양식)
 
'관덕정'이라고 쓴 현판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쓴 글씨라고 하며, 지붕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처마 부분을 많이 잘라냈다.
 
제주도의 대표적 누정 건축으로 건축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며 건물 안족 대들보와 그 아래에 그려진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4.3 항쟁의 전초인 3.1 사건이 벌어진 장소이다.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번재 맞이하는 3.1절로서 제주도 좌익진영은 이 날 기념식을 전도민적인 행사로 치르기로 준비하였다. 2월 17일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교육계,유교계,학교 단체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3.1 투쟁기념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2월 23일 제주도 민전이 결성되자 3.1기념 행사 준비는 민전이 주도하게 되었다.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별로 치러졌고, 제주 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 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제주 읍에서는 북국민학교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곧바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관덕정을 거쳐서 서문통으로 시위대가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굽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흥분한 관람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곧바로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던 무장경찰이 총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 된 여인도 있었다.
 

 

 

(+) 약 12시간을 바다 위에서 보낸 뒤, 가장 첫 일정은 용머리해안이었는데 도착시간이 새벽 5~6시쯤? 으로 어슴푸레 용두암 실루엣만 봤다. 그러므로 용머리해안의 사진은 생략...

어쨌든 4.3기행에서 가장 의미있는 첫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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