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벽골제
<벽골제의 구조 및 규모>
벽골제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인공저수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3년 (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중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방이 축조된 이래 1925년까지 1600년 동안 여러 차례 개수를 거듭해 왔는데, 1415년 수리하면서 세운 비석에 따르면 제방의 기리가 3240m, 둘레는 약 140km로 약 3240ha를 관개할 수 있는 큰 규모였다. 벽골제는 세계의 수리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물을 저장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완벽학 수리시설을 갖춘 저수지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로 만들어 둑은 두 개로 잘려지고, 수문도 두 개만이 남게 되엇다. 현재 벽골제는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의 포교(갯다리) 마을에서 남쪽의 월승리 초승마을까지 약 2.5km 구간과 장생거, 경장거 두 수문의 돌기둥만 남아있다. 각 수문에는 2개의 커다란 돌기둥이 마주 서 있고, 그 안쪽 면에는 너비 20cm, 깊이 12cm의 홈이 위에서 아래까지 파여 있어서 이 홈에 목판을 끼워 넣고 상하로 움직여 방류량을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또, 수문의 바닥에는 정방형의 큰 돌을 다듬어 깔아서 물이 방류도리 때 바닥이 파이는 것을 방지하였다.
<벽골제의 시대적 배경>
벽골제의 이름에서 보아도 이곳 김제 지역이 쌀농사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벽골제의 '벽골'은 바로 백제 때 이 곳의 지명이었던 볏골(벼의 고을)을 한자로 적은 것이라고 한다. 마한의 땅에서 건국 성장한 백제는 국가의 확대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극대화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상황이었고, 그러한 필요성은 결국 서기 4세기에 접어들면서 김제를 위시한 전북 지역으로 진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더군다나 벽골제와 같은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인력 동원과 함께 이들에 대한 국가 권력의 영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벽골제를 통하여 백제 통치체제의 확립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당시 백제는 만경강 일대 평양지대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켜, 이를 발판으로 이후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후에도 백제는 남방에 대한 기반확대와 진출에 더욱 힘을 쏟았을 가능성이 있다.
<벽골제에 대한 새로운 의견 - 방조제로서의 기능>
벽골제가 실제 저수지의 제방으로 기능했다는 것은 고문헌, 지리등의 기록을 통해 이미 역사가 길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벽골제가 과거 일정시기 '방조제'로 축조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벽골제가 동진강 만입에서 7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 이곳은 해발 고도 50m 미만의 지역으로 물을 가둘 만한 커다란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다는 점, 벽골제의 충적 토양이 갯벌의 개흙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백제 시대에는 그 앞의 땅이 갯벌이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원래 저수지는 배후의 들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좁은 골짜기의 하천을 막아서 만들지 해안에 인접한 넓은 평지에는 만들지 않는다.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수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둑을 길게 쌓아야 하고 무엇보다 농토가 물에 많이 잠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벽골제는 물을 가두기 위해 쌓은 저수지 제방이라기보다는 만조 시 해수의 역류를 막기 위한 방조제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처럼 만일 벽골제가 과거 일정시기 방조제였다면 이를 통해 벽골제는 숨겨진 가치를 드러낼 것이라고 전망해본다. |
▽ 원평천
<제 2수문 장생거 : 총 5개의 수문(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제방 및 제 2수문, 제 4수문이 남아있다. >
김제 벽골제비 및 제방
사적 제 111호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이 제방은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쌓았는데, 이처럼 대규모의 제방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통일신라 원성왕(785 ~ 798)대 늘려 쌓았고 고려와 조선시애데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나, 이후로 효용도가 적어 방치되었다.
지금은 포교리로부터 월승리에 이르는 약 3km 정도의 제방이 남아있다. 그 남북단 두 곳에 수문으로 썼던 돌기둥이 한쌍씩 세워져있다. 일제때 제방을 관개수로로 이용하여 원형을 크게 훼손하였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원래 제방의 높이는 6m 내외이고, 밑변 너비는 23m 가량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방 아래 장생거 동쪽에 조선 시대에 세운 벽골제비가 있다. 이 비석에 제방을 고쳐 쌓은 내용을 새겼는데, 마모가 심하여 읽기가 어렵다. : 벽골제는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 기술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벽골제 제방 및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수비가 사적 제 111호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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