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계화도 간척지
8.15 광복 후 최초의 대규모 간척사업은 1968년 방조제가 완공된 계화도 간척사업이었다. 이는 염습지가 아닌 어민의 어장을 대상으로 벌인 최초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기존의 운암제를 헐어내고 1965년에 완공한 섬진강댐과 연계된 것이었다. 섬진강댐의 건설로 늘어난 물은 섬진강 수력발전소를 거쳐 이 곳의 청호저수지로 오며, 간척지의 논은 섬진강댐 수몰민에게 주었다. 계화도 간척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계화면에 속해 있고, 면소재지인 창북리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도로 양쪽으로 820만 평에 달하는 드넓은 간척지가 있다. 섬 중앙에는 해발 246.2m의계화산이 있다. 계화도는 원래 섬마을 이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바닷물이 빠지면 드넓은 갯벌이 드러났었다. 창북리에서 하루 한 번씩 운행하는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썰물 때에 갯벌을 걸어서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섬진강 상류의 옥정리에 댐이 완공되어 운암호의 물이 증수되면서 발생한 수몰민 2768세대를 이주하기 위해 계화 간척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간척사업은 군사정부에서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에 따라 추진한 것으로 총 매립면적이 3968ha에 이른다. 9.2km의 제 1호 방조제는 1963 ~ 1966년간에, 3.6km의 제 2호 방조제는 1965 ~ 1968년간에 완공되었다.
이 곳에 조성된 촌락은 간척 사업자인 동아건설이 이주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한 가옥으로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가옥의 모양과 구조가 동일한 것이 특징이며, 열촌을 이루고 있다. 가옥의 재료는 함석(곁에 아연을 입힌 강철판)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립식 가옥의 양상을 보인다. 이 곳은 농경지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 기존의 육지였던 계화도와 창북리로만 마을을 집중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농경지에서는 마을을 볼 수 없다.
한편, 계화면은 가구당 경지 면적이 다른 지방보다 넓기 때문에 대부분 기계로 경작을 한다. 논들은 섬진강 댐에서 이곳의 저수지까지 도수로로 연결되어 섬진강댐을 증축함으로써 늘어나게 된 물을 쓰며, 이곳의 청호저수지는 섬진강 물을 끌어다가 퍼 담아 두는 저수지이다. 논에서 한번 쓴 물은 다시 쓰지 않고 바다로 흘러보내며, 기계화영농을 겨냥하여 간척지 안에 취락을 조성하지 않았다.
계화도 간척지는 현재 농업용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일조량이 많고 병충해 발생이 적은 신생토양지인 계화도에서 생산되어 맛과 질이 우수하고 미량원소가 풍부한 저공해 쌀로 유명하다. 이 간척공사로 매립된 갯벌의 면적은 총 3896ha 중 2741ha가 10년이 넘는 탈염 및 개답 과정을 거쳐 농경지로 만들어졌다. 1968년 계화 간척공사 이후부터 계화도에는 섬진강 댐 건설 지역의 수몰민들이 이주해 살고있다. 계화도에는 241동의 이주민 주택이 들어섰다. 이 결과 계화도는 5개의 원주민 마을과 4개의 이주민 마을을 합친 총 9개 마을이 계화라는 하나의 리단위로 묶여져 살아가게 되었다. 계화도 원주민들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하고, 정부로부터 간척농지를 분양 받아 이주해온 이주민들은 농사를 지었다. 원주민들은 간척공사로 자신들의 삶터였던 마을 앞 갯벌이 간척지가 되었지만 정작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고, 이주민들은 간척지 논 2필지와 주택을 제공 받았다. 그 후 마을 공동체가 어느 정도 안정되기 까지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대립과 갈등의 과정을 거쳤다. 1991년부터 시작된 새만금 간척사업은 다시 마을공동체를 분열시켰다. 농사를 짓는 이주민은 찬성했고, 어업에 종사하는 원주민들은 반대했다. 계화도는 1968년 계화간척 공사에 이어 현재의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두번째 간척과 고통을 함께 겪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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