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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장릉(莊陵) 은 조선 제6대 임금이었던 단종의 능으로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왕릉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 4리에 자리잡고 있다. 장릉의 영조양식은 아주 간결하고도 간단한 것이 특징이다. 왕릉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고,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하게 꾸민 능석물로 되어있고, 사각옥형의 장명등이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장릉에는 무신석이 없고 문신석만이 서있다. 묘 뒤쪽은 반달 모양의 꽃담장을 둘렀다. 이 꽃담장은 흙별돌 - ‘전을 진흙을 발라서 쌓고 기와를 얹었다. 그리고 기와 아래 바깥쪽 담은 화강암으로 별을 수놓듯이 장식하여 단아하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꽃담이다.
장릉을 조선시대의 다른 왕릉과 비교하여 보면 몇가지 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장릉은 제향을 문화제로 거행하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이며, 두 번째 특징으로는 조선조 때의 왕릉은 대부분이 서울에서 백리 안팎에 있는 것이 상례이지만 장릉은 그러한 관례를 벗어났다. 세 번째의 특징은 모든 왕릉의 위치는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으나 단종릉은 높은 위치의 산줄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으로 장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규모가 작지만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장릉의 영역에는 박충원 정려각, 엄흥도 정려각 등이 있고, 단종을 위해 순절하거나 희생된 여러 충신들과 종친, 시종들의 위패를 공동으로 모신 충신각이 있다. 이 밖에도 제향때에 제물을 차려 놓는 배식단, 제향, 제사를 거행하는 중심 건물인 정자각, 단종의 일생을 기록한 단종비각 등의 유적이 장릉 입구에서부터 왕릉까지 차례로 늘어서 있다. 2010 지리style 춘계 정기답사 초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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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청령포
영월읍을 사이에 두고 동강과 만나 남한강으로 흐르는 서강은 그동안 동강의 유명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서강 곳곳에는 결코 동강에 뒤지지 않는 빼어난 절경이 그득하다. 우선, 서강의 물줄기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영월의 관문에 위치한 선돌이 있고, 평창강이 주천강과 만나는 선암마을의 한반도 모양 지형과 단종이 유배되었던 방절리 청령포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곳은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이다.
1452년 단종은 왕위를 숙부인 세조에게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삼면이 서강의 물줄기에 둘러싸여 있고 뒤는 가파른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세상과 단절된 섬과 같은 곳이다. 지형학적으로는 하천이 물길을 바꿔가며 흘러 유로의 변경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평가되는 곳이기도 하다. 청령포를 돌아 흐르는 서강의 물줄기는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안쪽으로, 즉 맞은편 방절리 야산 쪽으로 크게 굽어 흘렀다. 그때는 영월에서 청령포로 들어오는 도로 옆의 논들도 서강의 물길이었다. 이렇게 옛날에 물이 흐르던 길을 구하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태백시 구문소가 자리한 동점동을 비롯하여 전국의 하천의 중상류 곳곳에 나타나는 지형이다. 강물이 흐르는 곳에서는 하방침식과 측방침식이 동시에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기반암에 발달한 절리나 구조선을 따라 계속적으로 침식이 가해지면 결국 목(neck) 부분이 절단되어 새로운 물길이 형성된다. 이후 절단된 구하도는 새롭게 형성된 더 낮은 물길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더 이상 물이 흘러 들어갈 수 없게 되니 기존의 물만 고여 있는 못으로 변하게 된다.
서강의 물줄기가 곡류 절단되어 현재의 청령포가 형성된 것은, 약 2,300만 년 전 신생대 제 3기 중기에 접어들면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축으로 하는 비대칭 요곡운동(지반의 급속한 융기)에 의해 물길이 빨라져 침식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방절리 구하도 토탄층의 절대 연령을 측정한 결과에 의하면, 지금의 물길로 유로 변경이 일어난 시기는 약 4만 5,000년 전이라고 한다.
2010 지리 style 춘계 정기답사 초록 |
▽ 버스 타고 지나가면서 찍은 구하도
△ 위성사진으로 본 구하도와 미앤더핵
(+) 입학한 뒤로 선배들에게 답사에 대해 물어보면 늘 강원도를 추천해주곤 하셨다. 제일 볼거리가 풍부한 지역이었고,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답사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도 강원도에 대해 많은 기대를 품었다.
우리 동기들이 집부가 되어 처음 계획한 답사라 의미가 있다. 학술부장, 과대표, 회장이었던 K와 K언니, L이 특히 무지막지 고생을 많이 했다. 또, 3년 내내 인솔하셨던 S교수님의 안식년으로 인해 K교수님과 함께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S교수님의 전공은 지형학, K교수님의 전공은 문화,역사지리학이어서 장소를 보는 시각도 굉장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