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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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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민속 문화재 제5호. 조선시대의 상류계층이었던 전주 이씨 일가의 삶터였다. 그러한 선교장은 배다리골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선교장 인근에는 강이 싣고 온 많은 토사들이 쌓여서 크기가 줄어들었지만 한때 오죽헌에서 강릉대학까지 이르는 30리의 길이가 되는 긴 석호였던 강릉의 북쪽 경포호, 서해안 보다 따뜻한 동해안의 성격을 증명할 수 있으며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하여 무성한 대나무 숲이 있는 오죽헌이 있다.
선교장의 건물은 우리나라의 계절별 특색을 반영하듯 추운 겨울을 나기위한 따뜻한 온돌방과 무더운 여름을 피하기 위한 대청이 설치되어있다. 선교장의 가옥구조는 강원도 강릉지방의 상류층의 가옥형태인 ㅁ자모양의 가옥으로 되어있다. ㅁ자모양의 가옥구조 안에는 ㄱ자모양의 안채와 ㄴ자모양의 사랑채로 구성이 되어있다. 지금의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의 옛 지명인 '배다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과거에 30리의 길이가 되었던 경포호를 건너기위해서 배를 타고 건넌다고 하여 배다리 마을이라고 불렸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선교장은 1756년부터 1938년까지 쉴 새 없이 가옥의 구조와 크기가 점차적으로 크게 변화해 왔었고 그 결과 선교장은 강원도지방의 상당부분의 땅을 소유하는 정도의 부자가 사는 곳이라는 소리를 듣는 정도로 변화해왔다. 선교장은 그만큼 커졌고 그로인해 과거의 강릉사람들은 선교장을 '아흔 아홉 칸의 집'이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지금은 쉰다섯 칸만이 남아있어 안타깝다. 선교장 인근에는 위에서 설명했던 경포호와 오죽헌을 비롯하여 안목항, 참소리박물관, 허균의 생가, 율곡 영정을 모신 문성사 등이 위치하여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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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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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여객과 화물 수송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인근에 강릉광업소를 비롯한 많은 탄광이 밀집해 있어 열차수송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이 지역 인구가 2,000명 미만으로 줄어들면서 1990년대 초부터는 열차가 거의 운행하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1995년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가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 촬영의 배경이 된 정동진역 일대도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정동진의 해돋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자 1996년 1월 여객취급 업무를 잠시 중지하고 구내 모양을 변경해 이듬해 3월부터 업무를 재개하였다.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해 지금은 해돋이를 보면서 미래를 약속하는 젊은 연인들의 언약식 장소이자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탈바꿈하였다.
전국에서 바다가 가장 가까운 역으로, 철도청에서는 서울 청량리와 정동진역 사이에 6시간 코스의 해돋이 열차를 운행하고 있으며, 국내의 장소마케팅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정동진은 강릉시내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약 18㎞ 떨어진 지점으로 한양의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부락 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실제로 정동진이 위치한 북위 37° 41′에서 선을 그으면 서울의 북한산을 지난다. 수치에 큰 차이가 없는 걸 보면 조선 시대 사람들의 방위 감각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정동진은 신라때부터 임금이 사해용왕에게 친히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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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해안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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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해안단구는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의 안인해수욕장에서 옥계면 금진리의 옥계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해안단구이다. 단구의 길이는 약 4㎞, 너비는 약 1㎞이며, 높이는 해발고도 75~85m이다. 단구의 표면은 거의 수평에 가까운 반면, 절벽인 단구애(段丘崖)는 수직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단구의 성분은 적갈색 흙과 모래·자갈이며, 작은 계곡이 발달해 있다.정동진의 해안단구는 한반도 지반의 융기와 해수면 변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해안단구 위에 자갈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해안에서 볼 수 있는 납작한 모양의 자갈들인데, 이것은 해식(海蝕)의 흔적으로 과거 이 일대가 바다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즉, 해안 근처의 파식대(波蝕臺)였던 이곳에 파도의 침식으로 마모된 둥근 자갈들이 쌓인 후 지반이 현재의 높이까지 융기하여 단구 지형이 만들어 진 것이다. 또한 정동진의 해안단구면은 5개의 단구면이 나타나는데 이는 적어도 다섯 차례 이상 간빙기를 겪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신생대 제3기 말에서 제4기 초인 200만~250만 년 전 지반의 융기작용과 해수면 변동에 따라 해수면이 80m 정도 후퇴하면서 바다 밑에 퇴적되어 있던 해저지형이 지금과 같은 위치로 육지화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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