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인천 차이나타운
답사/09 인천
2013. 2. 25. 10:32
|
1884년(고종 21) 조계를 맺은 지역. 인천역에서 중구 북성동, 선린동 일대를 '청관거리', '차이나타운'이라 부른다. 청나라는 이 곳에 영사를 설치하고 화교들은 인근에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화교상인들은 상권을 본격적으로 형성하였다. 1930년대 초반까지는 10여개 거상들이 중국 산동성 지역에서 소금과 각종 곡물을 수입하여, 최고의 번성기를 누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청관의 상권이 거의 마비되고 화교들 중 젊은 층의 화교들은 대만이나 미국, 동남아로 떠났으며, 남은 화교들 중 일부는 요리집과 잡화상들을 운영하거나 일부는 축항의 부두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
|
공화춘과 자장면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는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 때 군역상인들이 함께 들어옴으로써 공식적인 화교의 유입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화교유입이 활발해졌고, 인천공원(구 자유공원) 인근 북성동 일대 5000여평 부지에 화교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이 곳을 청관거리라 하였고 그들의 고급 음식을 청요리라 하였다. 공화춘은 청관거리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산동회관이란 간판을 걸고 처음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그 후 1912년 공화국의 밝아오는 아침이라는 뜻의 공화춘이란 상호로 변경하고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자장면의 역사는 현재 공화춘의 전신인 산동회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
(+) 흐린 날씨였다가 비같지도 않은 비도 내리고... 답사 첫날부터 날씨가 영 꽝이었다.
부산에서 인천까지는 몹시도 멀었다. 차이나타운에 도착해서 공화춘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탕수육도 먹고싶었는데.
먹고나서 차이나 타운을 자유답사했다. 내내 내일은 비가 안오도록 기도했다. 아브라카다브라.
글
보성 녹차
답사/09 전라
2013. 2. 24. 17:16
|
보성 차밭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에 위치. 해풍,안개, 흙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차 재배의 최적지로 일컬어진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하면, 보성은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는 재배면적에 있어서 전국의 28%를 차지하며, 생산량은 27.3%에 달한다. 보성에서 처음으로 차나무가 재배된 것은 1939년, 보성이 녹차 생산에 필요한 조건을 두루 갖춘 차나무 재배의 적지로 판명되면서 일본인이 기업식으로 차밭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차 전문가들은 보성을우리나라 최적의 차 재배지로 선정하여 30ha에 차를 심었는데, 당시 저임금의 한국인 노동력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플랜테이션'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광복 후에는 거의 10년 동안 버려져 있다가, 1957년 대한다업에서 이 차밭을 사들여 오늘날 보성 차밭 단지의 기초를 다졌다.
보성다원은 차의 생산뿐만 아니라, 중요한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드라마 '여름향기'의 촬영지이기도 한 이 곳은, 차 재배의 오랜 역사를 기반으로 하여 '다향제'라는 차 문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보성군은 매년 이 다향제를 개최하여, 한국 차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차 문화를 사회에 파급함으로써, 보성다원을 찾는 관광객 수가 늘어나고 경제적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보성과 녹차를 결부시키는 하나의 지역브랜드를 확립시켰다. 최근, 보성군은 초록색 가로수 배경을 뒤로한 보성 녹차 마라톤도 개최한다고 한다.
|
글
울돌목
답사/09 전라
2013. 2. 24. 17:08
|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의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명량해협 또는 명량수도라고도 한다. 길이는 약 1,000m, 폭은 약 500m, 단면적은 약 8500㎡이고, 진도대교 부근 울돌목의 가장 좁은 부분은 길이 약 100m, 폭 300m, 중앙부 수심은 약 20m 정도이다. 울돌목이라는 이름은 굴곡이 심한 암초 사이를 소용돌이치며 달리는 조류가 울음소리를 내며 급하게 흐르기 때문에 '바다가 우는 길목'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곳의 유속은 평균 5.5m/s , 해수면 표층의 유속은 최대 6.5 m/s으로 매우 빠르다. 그 이유는 수도(水道) 남단에서의 고조시각이 서단에서의 고조시각보다 1시간 40분 정도 빨라, 밀물 시와 썰물 시 해협의 양단에서 약 2m 수위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10:30a.m. 물살이 가장 세다.)
울돌목의 상공에 떠 있는 진도대교는 해남군과 진도를 잇는데, 제 1대교는 1984년 10월, 제 2대교는 2005년 12월에 각각 완공되어, 현재 쌍둥이다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진도대교 양쪽 밑에는 이런 물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
|
명량대첩이 일어난 곳 : 이순신장군 동상이 세워져있다. 울돌목은 명량대첩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명량대첩이란 1597년 9월 16일, 정유재란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 해협의 강한 조류를 이용하여 아군 12척의 함선으로 왜선 130여척을 궤멸시킨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대승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한산도대첩, 노량해전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해전에 속한다. 왜군은 조류가 남동쪽에서 북동쪽, 즉 자신들의 항해 방향과일치할 때 전세를 밀어붙일 계획이었으나, 조선 수군의 공격에 전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후가 되자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 후퇴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전멸하였다. 당시 왜군은 400여척에 2만 명의 병사를 싣고 울돌목을 통과하여, 북상 중인 육군과 연합으로 수도 한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 해전으로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이해전은 곡창 지대인 호남 지방을 왜군에게 빼앗기지 않았다는 전략적 의의를 가지기도 한다. 명량대첩 기념관에는 이 해전의 의미를 압축한 "양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비문이 있는데, 이를 해석하면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
|
도진 취락 : 과거 다리로 이어지기 전에는 나룻배로 왕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나룻배가 발착하는 도선장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도진취락이라고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