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

답사/09 전라 2013. 2. 24. 15:48

 

<벽골제의 구조 및 규모> 
 
  벽골제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인공저수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3년 (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중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방이 축조된 이래 1925년까지 1600년 동안 여러 차례 개수를 거듭해 왔는데, 1415년 수리하면서 세운 비석에 따르면 제방의 기리가 3240m, 둘레는 약 140km로 약 3240ha를 관개할 수 있는 큰 규모였다. 벽골제는 세계의 수리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물을 저장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완벽학 수리시설을 갖춘 저수지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로 만들어 둑은 두 개로 잘려지고, 수문도 두 개만이 남게 되엇다. 현재 벽골제는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의 포교(갯다리) 마을에서 남쪽의 월승리 초승마을까지 약 2.5km 구간과 장생거, 경장거 두 수문의 돌기둥만 남아있다. 각 수문에는 2개의 커다란 돌기둥이 마주 서 있고, 그 안쪽 면에는 너비 20cm, 깊이 12cm의 홈이 위에서 아래까지 파여 있어서 이 홈에 목판을 끼워 넣고 상하로 움직여 방류량을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또, 수문의 바닥에는 정방형의 큰 돌을 다듬어 깔아서 물이 방류도리 때 바닥이 파이는 것을 방지하였다.

 

<벽골제의 시대적 배경>

 

  벽골제의 이름에서 보아도 이곳 김제 지역이 쌀농사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벽골제의 '벽골'은 바로 백제 때 이 곳의 지명이었던 볏골(벼의 고을)을 한자로 적은 것이라고 한다.

  마한의 땅에서 건국 성장한 백제는 국가의 확대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극대화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상황이었고, 그러한 필요성은 결국 서기 4세기에 접어들면서 김제를 위시한 전북 지역으로 진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더군다나 벽골제와 같은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인력 동원과 함께 이들에 대한 국가 권력의 영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벽골제를 통하여 백제 통치체제의 확립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당시 백제는 만경강 일대 평양지대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켜, 이를 발판으로 이후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후에도 백제는 남방에 대한 기반확대와 진출에 더욱 힘을 쏟았을 가능성이 있다.

 

<벽골제에 대한 새로운 의견 - 방조제로서의 기능>

 

  벽골제가 실제 저수지의 제방으로 기능했다는 것은 고문헌, 지리등의 기록을 통해 이미 역사가 길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벽골제가 과거 일정시기 '방조제'로  축조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벽골제가 동진강 만입에서 7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 이곳은 해발 고도 50m 미만의 지역으로 물을 가둘 만한 커다란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다는 점, 벽골제의 충적 토양이 갯벌의 개흙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백제 시대에는 그 앞의 땅이 갯벌이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원래 저수지는 배후의 들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좁은 골짜기의 하천을 막아서 만들지 해안에 인접한 넓은 평지에는 만들지 않는다.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수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둑을 길게 쌓아야 하고 무엇보다 농토가 물에 많이 잠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벽골제는 물을 가두기 위해 쌓은 저수지 제방이라기보다는 만조 시 해수의 역류를 막기 위한 방조제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처럼 만일 벽골제가 과거 일정시기 방조제였다면 이를 통해 벽골제는 숨겨진 가치를 드러낼 것이라고 전망해본다.

 

 

 

▽ 원평천

 

 

<제 2수문 장생거  : 총 5개의 수문(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제방 및 제 2수문, 제 4수문이 남아있다. >

 

 
김제 벽골제비 및 제방
 
사적 제 111호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이 제방은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쌓았는데, 이처럼 대규모의 제방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통일신라 원성왕(785 ~ 798)대 늘려 쌓았고 고려와 조선시애데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나, 이후로 효용도가 적어 방치되었다.
  지금은 포교리로부터 월승리에 이르는 약 3km 정도의 제방이 남아있다. 그 남북단 두 곳에 수문으로 썼던 돌기둥이 한쌍씩 세워져있다.
  일제때 제방을 관개수로로 이용하여 원형을 크게 훼손하였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원래 제방의 높이는 6m 내외이고, 밑변 너비는 23m 가량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방 아래 장생거 동쪽에 조선 시대에 세운 벽골제비가 있다. 이 비석에 제방을 고쳐 쌓은 내용을 새겼는데, 마모가 심하여 읽기가 어렵다.
 
 
: 벽골제는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 기술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벽골제 제방 및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수비가 사적 제 111호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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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면

답사/09 전라 2013. 2. 24. 15:32

 

  광활면의 광활은 '넓고 탁 트인 곳'이라는 데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원래 광활면은 동진강 하류의 간석지 인데, 자  생 소나무가 한 그루도 없고, 농토는 염분의 영향으로 비옥하지 못했다. 1923년 10월 일본인 재벌 아부방차랑이 자기 자본 100만엔과 일본 정부 보조금 100만엔 등 200만엔으로 동진농업 주식회사를 창설하고 방조제를 쌓기 시작하여 만 3년 후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에 바닷물이 드나들던 이 곳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으로 만들기까지는 다시 9년이 걸렸다. 결과적으로 광활면에는 1828 정의 논이 생겨나 논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1답구>에서 <9답구>까지 이름을 붙임으로써 이 것이 곧 마을 이름이 되었다. 

 

보통 간척지를 경작하는 주민들은 농경지로부터 떨어진 원래의 해안선 부근의 구릉지에 집촌을 이루기도 하지만, 간척지의 규모가 큰 경우에는 농경지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농경지와 농가를 밀착시켜 산촌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농경에는 유리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각종 편의 시설이 들어서기 어려운 것이 단점이다. 또한 식수와 댈감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많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등 생활환경이 열악한 편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광활면 간척지의 촌락은 열촌의 형태로 농토와 수로가 이어지는 곳에 드문드문 6가구씩 배열된 열촌을 이루고 있으며, 각 농가는 일자형 3칸 평면구조의 가옥형태가 나타난다. 이와 같은 촌락과 가옥의 형태는 일제가 영농의 편의, 공동작업의 실시, 소작인의 감시의 효율화를 위해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아직도 일부는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수십 가구의 마을로 성장하여 원래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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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도 간척지

답사/09 전라 2013. 2. 24. 15:29

 

 
   8.15  광복 후 최초의 대규모 간척사업은 1968년 방조제가 완공된 계화도 간척사업이었다. 이는 염습지가 아닌 어민의 어장을 대상으로 벌인 최초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기존의 운암제를 헐어내고 1965년에 완공한 섬진강댐과 연계된 것이었다. 섬진강댐의 건설로 늘어난 물은 섬진강 수력발전소를 거쳐 이 곳의 청호저수지로 오며, 간척지의 논은 섬진강댐 수몰민에게 주었다.
 
  계화도 간척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계화면에 속해 있고, 면소재지인 창북리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도로 양쪽으로 820만 평에 달하는 드넓은 간척지가 있다. 섬 중앙에는 해발 246.2m의계화산이 있다. 계화도는 원래 섬마을 이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바닷물이 빠지면 드넓은 갯벌이 드러났었다. 창북리에서 하루 한 번씩 운행하는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썰물 때에 갯벌을 걸어서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섬진강 상류의 옥정리에 댐이 완공되어 운암호의 물이 증수되면서 발생한 수몰민 2768세대를 이주하기 위해 계화 간척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간척사업은 군사정부에서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에 따라 추진한 것으로 총 매립면적이 3968ha에 이른다. 9.2km의 제 1호 방조제는 1963 ~ 1966년간에, 3.6km의 제 2호 방조제는 1965 ~ 1968년간에 완공되었다.

 

  이 곳에 조성된 촌락은 간척 사업자인 동아건설이 이주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한 가옥으로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가옥의 모양과 구조가 동일한 것이 특징이며, 열촌을 이루고 있다. 가옥의 재료는 함석(곁에 아연을 입힌 강철판)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립식 가옥의 양상을 보인다. 이 곳은 농경지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 기존의 육지였던 계화도와 창북리로만 마을을 집중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농경지에서는 마을을 볼 수 없다.

 

  한편, 계화면은 가구당 경지 면적이 다른 지방보다 넓기 때문에 대부분 기계로 경작을 한다. 논들은 섬진강 댐에서 이곳의 저수지까지 도수로로 연결되어 섬진강댐을 증축함으로써 늘어나게 된 물을 쓰며, 이곳의 청호저수지는 섬진강 물을 끌어다가 퍼 담아 두는 저수지이다. 논에서 한번 쓴 물은 다시 쓰지 않고 바다로 흘러보내며, 기계화영농을 겨냥하여 간척지 안에 취락을 조성하지 않았다.

 

  계화도 간척지는 현재 농업용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일조량이 많고 병충해 발생이 적은 신생토양지인 계화도에서 생산되어 맛과 질이 우수하고 미량원소가 풍부한 저공해 쌀로 유명하다.

  이 간척공사로 매립된 갯벌의 면적은 총 3896ha 중 2741ha가 10년이 넘는 탈염 및 개답 과정을 거쳐 농경지로 만들어졌다. 1968년 계화 간척공사 이후부터 계화도에는 섬진강 댐 건설 지역의 수몰민들이 이주해 살고있다. 계화도에는 241동의 이주민 주택이 들어섰다. 이 결과 계화도는 5개의 원주민 마을과 4개의 이주민 마을을 합친 총 9개 마을이 계화라는 하나의 리단위로 묶여져 살아가게 되었다. 계화도 원주민들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하고, 정부로부터 간척농지를 분양 받아 이주해온 이주민들은 농사를 지었다. 원주민들은 간척공사로 자신들의 삶터였던 마을 앞 갯벌이 간척지가 되었지만 정작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고, 이주민들은 간척지 논 2필지와 주택을 제공 받았다. 그 후 마을 공동체가 어느 정도 안정되기 까지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대립과 갈등의 과정을 거쳤다. 1991년부터 시작된 새만금 간척사업은 다시 마을공동체를 분열시켰다. 농사를 짓는 이주민은 찬성했고, 어업에 종사하는 원주민들은 반대했다. 계화도는 1968년 계화간척 공사에 이어 현재의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두번째 간척과 고통을 함께 겪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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